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제국 (문단 편집) === 몰락 === 사실 일본 제국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 미국에 유학하거나 공무를 본 자들은 미국의 산업 능력과 그 잠재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사력상 차이가 있더라도 하와이에 주둔한 미 태평양함대와 같이 주요 전력에 선제 공격을 취해 전투불능으로 만든다면 미국은 함대재건에 오래 걸리며 함대를 재건하는 동안 일본은 확보한 제해권으로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본토 공격카드를 내기가 가능하기에 항공모함과 전함을 궤멸시키고 나면 미국 측이 적극적으로 평화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이라 오판하였다. 이는 [[러일전쟁]] 당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당시 일본군이 러일전쟁의 진상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는 것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정신승리 했거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협상장으로 나온 진짜 이유는 [[쓰시마 해전]]과 같은 일본군의 전력 우세 때문이 아니었다. 이 당시 상황이 더 안 좋은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사기를 높이긴 했지만, 전쟁 치른다고 영국과 미국한테 빌린 차관이 이미 국가재정으로 갚기에도 벅찰 정도로 한계에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전쟁 자체는 계속 치를 수 있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외국과의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부 혼란부터 해결해야 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은 간신히 완료만 된 상황이고 기타 인프라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한 유럽에서의 보급에도 차질이 심각했다. 즉 러시아의 국력이 100, 일본의 국력이 60이었다고 해도, 러시아는 유럽 쪽에 70, 아시아 쪽에 30으로 나뉘어 있고, 유럽에서 30을 더 끌고 와서 일본을 대적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거기다 이미 러시아는 일본의 배후에 자신들의 태평양 진출을 고깝게 보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이 밀리려고 한다면 지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상장에 나온 것이다. 다만 일본 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도 미국 태평양의 해군력은 일본 제국 해군력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제국 해군력은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인해 당시 시대상 주 전력인 전함 보유수를 제한받았기에 어떻게 해야 군축조약에 걸리지 않고 전력을 상승시켜야 하나 라는 깊은 고민 끝에 당시 영국, 미국 등이 잃어도 개의치 않던 항모를 이소로쿠 제독을 포함한 일부 제독들이 눈여겨보기 시작, 집단운용과 구축함의 화력을 높이기 위한 산소어뢰 같은 연구를 하였다. 물론 일본은 워싱턴 군축조약에서 나와 제약이 사라지자 바로 [[야마토급 전함]]을 건조하는 큰 삽질을 한다. 게다가 전함도 당시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으로 부터 편의를 받은지라 [[공고급 순양전함]], [[나가토급 전함]]을 자력으로 만들정도의 건조기술 덕에 연합함대는 당시 미 태평양함대의 해군과 나름 비빌만한 정도였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를 했어도 압도적 우세에서 비교적 우세로 낮춰졌을 정도였다. 게다가 F2A 버팔로, F4F 와일드캣으로 구성된 미국의 주력 함재기들은 [[제로센]]에 비하면 속도와 선회력 면에서 뒤떨어졌고 F4F만 상대가 가능했다.[* 일본군의 육해군을 가리지 않는 병크와 병맛의 극치 때문에 저평가되는 면이 있지만, 이 당시 일본 해군의 전력만은 무사시나 야마토와 같은 대형 전함부터 미군도 위협적으로 여기던 쇼카쿠와 즈이카쿠와 같은 항모의 존재 등 나름 한끗발 나갔다. 문제는 이러한 전함이나 항모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석유가 물주인 미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늘 부족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지휘관들 중 [[야마구치 다몬]]과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제외한다면 하나같이 삽질만 하는 똥별이거나 [[나구모 주이치]]처럼 임기응변으로 전략을 짤 수 없는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장군들이 지휘봉을 잡고있는 바람에 결국 이런 전력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정작 최대만수량 기록을 찍은 전함 야마토는 무지막지한 기름비와 거함거포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투입 자체가 줄어 '야마토 호텔' 이라는 드립으로 후세에 비웃음이 될 정도로 제대로 굴리지도 못하였고 결국 전쟁 후반에 들어섰을때 격침되었고, 후에는 제공권과 더불어 제해권까지 싸그리 미국에게 뺏긴 채 영향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게다가 일본군은 [[중일전쟁]]과 [[말레이 해전]]을 통해 나름 실전경험이 풍부한 베테랑급 조종사들까지 있었기에 이들은 침착하게 진주만 습격 때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강화협상에 나오기는커녕 매우 분노한 미국은 압도적인 공업기반과 미국 본토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원을 이용하여 1년간 시간을 들인 뒤 전시공업 체제로 넘어간 이후로는 함선과 함재기 등 엄청난 물량을 찍어내며 양적인 열세는 물론 질적인 열세를 극복하였다.[* 이 당시 미국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시공업 체계로 발빠르게 움직여 총기는 물론 에식스급 항모와 순양함을 빠르게 수십 척을 한꺼번에 계약하였고 그 결과 1달에 1척씩 풀빵 찍듯이 뽑아대고 순양함을 1주일에 1척 씩 뽑아내는 쇼미더머니를 보여주었고, 미국은 이러한 공업력과 제대로 돌아가는 군대를 바탕으로 일본을 짓밟기 시작했다. 이 당시 미국의 공업력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해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압도적인 생산량을 자랑했다.] 한편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당한 미국은 전국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분노[* 이 당시 인종차별이 만연하였고 백인우월주의도 상당했기에 우수한 인종 백인을 상대로 열등한 황인종이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충격이 곧 인종차별성 분노로 바뀌었다.]로 바뀌었으며 정치권도 이 여론을 의식하여 일본 제국에게 항복 제스쳐나 다름없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는 것을 거부한다.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자 나치 독일도 선전포고함에 따라 미국은 자연스럽게 연합군에 가입하여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포함한 추축국을 무너뜨리기로 결정[* 당시 식민지로부터 오는 보급로가 끓겨 미국의 지원과 구매한 상품을 받으면서 악착같이 버티던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이 소식에 영국이 이겼다며 기뻐했다는 후문이 있었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한다. 당시 미국의 국가기반은 넘쳐나는 자원을 바탕으로 한 공업력으로 인해 세계 초강대국인 영국을 넘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초강대국으로 넘어갈 잠재적인 기반이 큰 나라였고 계기만 있다면 초강대국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제국의 정권을 잡은 군부는 육군/해군으로 파벌이 더 심화되어 서로 이득이라는 파이를 더 차지하기 위해 육군/해군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같이 싸워도 모자랄 판에 반목하며 정보조차 공유를 안 하고 육군이 보급용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사사건건 서로 견제하느라 바쁜 개판인 상황이었다. 일본 본토에서 나오는 자원은 전혀 없었고 당시 아시아 중에서는 가장 발전한 공업국가였으나 미영 열강과 비교한다면 공업기술은 매우 뒤떨어졌다. 오죽하면 자국에서 개발 및 양산한 치하 중전차마저 스튜어트 경전차에 비해 성능이 열등했을 정도였다. 더욱이 1937년부터 발발한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미국과의 장기전은 필패뿐이었다. 물론 진주만 공습으로 선제공격을 한 상태였으며 전쟁 초기에는 나름 해군 주력함대가 나름 열강들에게 비빌수 있던 일본제국 해군이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일본제국 해군의 자만과 [[미군]]이 승률을 높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 끝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정규항모 4척을 전부 소실하는 대실패와 파일럿과 같은 고급인력 1회용 취급, 대책없는 확장으로 인해 방어전력이 너무 분산된 나머지 과달카날 전역의 패배를 시작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면 미국은 1년간 전시공업 체제 전환이 마치자 미국 본토의 막강한 산업력을 기반으로 세를 불려가기 시작하여 뉴기니, 괌, 필리핀, 사이판 등의 점령지를 차례로 되찾고, 우수한 무기로 인해 개개인 전투력마저 압도되다 보니 수세에 몰린 일본 제국은 이오지마 섬과 내지의 일부인 [[오키나와]]마저 뺏겨 수도권을 포함한 전 국토가 미 육군항공대 폭격기들의 사정권에 들어 공습으로 불바다가 되는 등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졌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조금이라도 승산을 가지려면 진주만 공습 직후 중국 쪽 전역을 포기하고 태평양 전선에 모든 전력(특히 항공모함)을 총동원해 제해권 자체를 점탈해야 했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승산을 가지기 위해서일 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전략적으로 완전히 이길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다고 미군의 전략폭격기 B-29를 격추하고 싶어도 갈 수 있는 고도제한의 격차가 심해서 B-29가 고도를 높이는 순간 제로센들은 쫓다가 돌아올 수 밖에 없었으며, B-29 자체의 보호 무장과 이를 호위하는 제공기들의 존재로 인해 B-29는 [[일본 본토 공습]] 당시 추락하는 일이 엄청 적었다. 이는 [[독일 본토 항공전]] 당시 미국, 영국의 공군에게 여전히 위협적이었던 독일의 공군력, 방공 능력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본토 상황도 나쁜데 동맹국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연합군의 주역인 미영중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무조건 항복이라는 최후통첩을 권고한다.[* 소련은 포츠담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때까지도 중립 조약이 유효했고 또한 대일 참전 의도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천황제 유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쟁 이전 식민지 유지, 천황제 유지, 자국에 의한 무장해제, 전범을 자신들이 재판 등등 연합국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조건을 걸며 조건 있는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끝까지 1억 총옥쇄를 주장하며 결호작전을 짜며 항복을 거부한다. 한편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너무 큰 피해를 입은 미국은 이런 일본 제국의 모습에 몰락작전 내용을 구상하면서도 상륙군의 안전을 위해 원자폭탄을 떨군다라는 발상을 한다. 결국 미국은 몰락작전 시행 전 새로 개발한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기 위해 맨하탄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한 [[원자폭탄]]을 일본 본토에 떨구기로 결정했고, 일본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원자탄 폭격을 한 발도 아니고 무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두 발이나 맞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동맹국 간 회의에서의 약속에 따라 아시아에 영향력을 만들기 위해 [[만주 전략 공세 작전|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대일 전쟁에 참가하자]] 쇼와 천황과 항복파 장교들은 반대파의 저항을 무릅쓰고, 천황의 옥음을 녹음하고 [[궁성사건|우익 청년장교들의 방해를 해친 끝에]] 마침내 [[옥음방송|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며]] 전쟁은 1945년 8월 15일 부로 끝나고 미국 전함 미주리 함교에서 일본 대표단이 무조건 항복문서에 공식 서명함으로써 [[일본의 항복]]이 이루어져 일본 제국은 사실상 패망하고 일본 제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모든 식민지는 연합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독립하였고, 타이완과 남사할린 등 제국주의 시기에 강탈한 영토는 [[중화민국]], [[소련]]에, 2차 대전기의 점령지 역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구 열강에 다시 반환되었다. 그 중 류큐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쿠릴 열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고 미국은 미일동맹의 개선에 따라 이들 점령지를 일본에 돌려주었으나 소련은 이들 지역을 모조리 자국령으로 삼아 현재까지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다. 일본제국의 해체뒤에도 헌법 개정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아 헌법상 국호는 계속 '대일본제국'이었지만, [[GHQ]]의 통치를 받던 [[1946년]] [[11월 3일]]에 [[일본국 헌법]]이 공포, [[1947년]] [[5월 3일]]에 시행되어 [[국체(일본 제국)|국체]]가 완전히 변하고 정식 국명을 일본국(日本國, Japan)으로 고쳤다. 일본의 주권은 GHQ에 완전히 종속되어 그들에 관리체제하에 있었으며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 군정에서 체제에서 벗어날 때까지 미국의 관리체제에 있던 보호국이었지 주권국가가 아니었다. 일본 공화국이 아닌 일본국인 이유는 GHQ가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맥아더의 판단 끝에 천황제를 폐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상층부에서는 천황제의 폐지가 일본에게 엄청난 반미 반서방감정을 양성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당시 미국등 연합군측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이유로 [[히로히토]]를 전범재판에 올려 없애고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천황을 법정에 세우거나 천황제를 폐지하진 않되 히로히토를 퇴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태평양 육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가 이를 제지했다. 결과적으로 천황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전전의 권한이 대폭 축소된, 입헌군주로서의 상징적 존재로 만들기로 방침을 결정하여, 맥아더가 쇼와 덴노를 만나 인간선언을 요구한 끝에[* 쇼와 덴노는 천황의 신성성은 말이 그럴 뿐이지 일본 국민들은 어차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쑥스러워 했다. <국화와 칼> 참조.] 현대의 [[일본]]에서 [[천황]]은 그저 '국가 통합의 상징'일 뿐 아무런 정치적 권력이 없고 정치적 논란을 불러올 발언을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또한 쇼와 덴노 사후 즉위한 [[아키히토]] 상황은 어릴 때 전쟁을 겪었기에 전쟁이라면 진절머리 나서 정계와는 거리를 많이 두며 이러한 기조는 현 천황인 [[나루히토]]도 유지한다.[* 아키히토 상황은 전쟁 중의 가미카제 특공의 실용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천황을 정치적 논란에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이 암살 위협을 받으며 때문에 천황 본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궁내청]]이 제한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